Sunday, December 20, 2015



November 29, 2015
The First Sunday of Advent
Preacher: The Reverend Dr. Lucy A. Forster-Smith
Sedgwick Chaplain to Harvard University
and Senior Minister in the Memorial Church

Advant 대강절 첫번째 주일 말씀. 
요약: NIH에 따르면 미국인의 19%인 40 million 인구가 Anxiety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울증 9%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높은 제일의 정신의학적 문제이다. 테살로니가전후서를 보거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떠난 이후 재림하시기 까지의 우리의 상태이다. 마음이 굶주린 자에게 복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인간의 육체의 모두가 천국을 소망하도록 지어져 있다. 우리는 간절함으로 천국을 기다린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러울 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옴을 더 영민하게 기다린다. 

이 말씀을 2주전에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카운슬러를 찾아갔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더이상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고 종교도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었다. 싫다기 보다는 다 귀찮았다. 피곤하고 힘들고 무력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듣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곤궁한 것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인간의 현 주소가 아닌가? 대체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음껏 행복할 수 있는 있기는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것이 한시적인 허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며칠전 퇴근길에 그런 상상을 했다. 
내가 만일 캘리포니아의 사계절 따뜻한 동네에 살게 된다면... 자식들을 낳아 키우고 그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내 집을 가지고 집안을 꾸미고 사람들과 어울려 주말에 소탈하게 교제 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예쁨 받으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하나씩 켜고 그 불빛속에 환상을 보듯이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고 상상의 성냥불은 꺼졌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상상 하는 것으로 잠시 행복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을 그렇게 이해 할 수 있을까? 
당신의 다시 오심을 상상하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Sunday, October 11, 2015

청춘FC 오성진




짠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켜보고 있는 청춘 FC
늘 보면서 나도 좀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프로그램이다.

근데 오늘 (2015/10/10) 편은 마음이 너무 먹먹했다.
티비고 영화고 다큐멘터리고 떠나서
올해 들어서 본 것중에 가장 슬펐다.

다른 선수 동료들은 휴가를 맞아 가족, 친구, 여자친구들과 신나게 놀 때,
오성진 선수는 혼자 밤 늦게 까지 포장마차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도왔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올인했던 오성진 선수는 브라질 유학 간지 20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성진군이 흔들릴까봐 알리지 않은것

그렇게 홀어머니와 도우며 살면서 늘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오성진 선수는
꾸준히 팀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면서 프로팀의 스카우트 될 것 같은 선수들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두경기를 앞두고 훈련 도중에 발 뼈에 금이가고 전치 4-5개월을 받았다. 사실상 청춘FC와 함께하는 마지막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상의 종류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과부하로 인한 것이라고 하니 언젠가 터졌을 폭탄이 터진 셈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돌아와서 숙소에서 울었다.
"거의 다 왔는데" 라는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열심히 했고, 잘 했고, 가진것 아무것도 없는 모자 가정이 꿈꾸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인고의 시간 끝에서, 꿈꾸던 문의 바로 코앞에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 프로그램의 엔딩은 아름다웠던 그의 지난 활약을 모아서 스페셜로 보여 주었다.

이것이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영화였다면 그렇게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시간에도 오성진 선수는 집에서 다친 발이 낫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포장마차를 하시고.... 그가 집에 돌아와 우시는 어머니를 달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일아침에 늦잠자면 엄마가 또 등짝 때리면서 일어나라 그러실 거라고 해맑게 농담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슬프지만 좌절하지 않을 것 같은 오성진을 본다.

현실은 참 냉정하고 상황을 봐 주지 않는다. 아무리 안정환 감독 이을용 감독 같이 마음을 써주는 지도자 아래에 있다고 해도, 불가항력의 것들이 존재한다. 정말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명은 무시무시 하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가진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자들에게서 그 하나를 가져 가셨는가? 만일 하나님이 하신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이런 이에게서도 기회를 거두시는데 나같은 이에게서 기회를 거두시기는 얼마나 더 쉬우실까?

꿈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꿈을 쫒는가? 오선수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이런 일을 겪었으니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좌절을 겪고 마는가?

아무쪼록 오성진 선수가 빨리 완쾌되고 또 구원의 손길이 닿아서 그가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불가항력의 운명 앞에 한 인간의 모든 꿈이 전부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화면 너머에서 나는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고 화가난다.




Friday, September 25, 2015

오후 5시. 캠퍼스

5시라 도서관이 문을 닫아서 밖에 나왔다.

가을이라서 날씨가 선선하지만 아직 햇살이 남아서 따뜻하다.

하루종일 햇볕을 못쐬었으니 잠깐 밖에서 앉아서 일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학교 교회 앞... 햇볕도 좋고 인터넷도 잘 된다.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데 관광객들과 학교 투어 가이드가 다가와서 한창 설명을 하고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는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하버드 졸업식이 매년 이루어지고 내가 앉은 이 돌계단 위에서 여러 졸업 축하 연사들이 초청되었다고... 마더 테레사, 마틴 루터킹, 미국의 모든 대통령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뭐 그들이 다녀간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게 아니라... 내가 일하는 자리에 그들이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겠지만.

호젓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이렇게 자리하고 앉아서 일할수 있어서 좋다. 매일 이럴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특별한 곳에서 편안할 수있어서 신기하고... 또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나중에는 이시간이 그리울까 싶다. 미치도록 바쁜 오늘이지만, 지금 이순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해가 넘어갈 때 까지만 이러고 있어야 겠다.


Sunday, September 6, 2015

청춘 FC

청춘FC를 보고 있다.

오늘은 안감독이 정현이를 불러다가 야단을 쳤다.

한국으로 돌려 보내려고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놨다가

그래도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돌직구로 정현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말을 해 주었다.

여기서 그냥 한국 가면 그것도 잘 못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안해서 짤려서 한국 가면

그 치욕은 벗기 힘들 것이다.

지금 우는 이유를 잘 기억해라

세상은 너에게 기회를 두번 주지 않는다.



몸이 아팠던 멤버였고 선발도 아니라 의욕도 많이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해도 가고 공감도 많이 갔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정현이의 길을 가고 있구나. 하지만 나에게는 누구도 그것을 말해줄 사람이 없구나.

혹 말해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듣지 않았구나.

나를 구제해 줄 사람은 나뿐이고

내가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나 스스로 이구나.


지금도 나의 몸이 너무 아프다.

매일 매일 아프다.

일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깨와 목이 아프다

그리고 일이 정말 잘 안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노력을 그만 하고 싶어 진다.

성과도 없는데 나태해 지는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다.

몸이 아프니까 머리도 몽롱해지고 집중력을 잃는다.



한 때는 축구 신동들

이름 뒤에 '신'자가 붙을 정도로 잘한다던 아이들인데

지금은 어떤 스카우터들도 그들이 속해있는 팀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부상으로, 계약 실패나 인간적인 문제들로 인생의 한 시점에서 더 치고 올라가지 못해

영원히 낙오 해 버린 한때의 영재들...


나는 4년차 포닥으로 서른 네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K99프로포절을 쓰면서

나는 나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나는 아직은 '벨기에 합숙소'에 머물러 있다.

그곳에서도 나는 선발이 못되고 후보선수 밖에 안되는데다가

부상까지 있다.

희망도 희박하지만

내게 선택 또한 없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받아들고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흩어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안되는 것을 되게 할 수 밖에 없다.

호랑이 굴에 떨어진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고 살 방법을 찾아봐야 겠다.





Friday, August 21, 2015

벛꽃, 다시 벛꽃 (사쿠라호사라) - 미야베 미유키


미야베미유키의 에도물이다.

지인이 이렇게 물었다. 또 에도물이냐고 에도물이 뭐가 좋냐고.

사실 이 책이 에도물인지는 모르고 구입을 했다. 한국에 갔다가 오는 사람에게 책 부탁을 하고 싶은데 무슨 책을 사야 할지 모를 때에 책을 많이 읽는 다는 지인의 지인의 추천으로 받은 목록에서 강추 몇권을 무작위로 부탁한 것중에 하나이다.

그렇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은 이번에도 참 좋았다.

단순한 삶. 조금은 느린 페이스. 따뜻한 사람들. 예의가 있고 격식이 있는 말투들... 그리고 민담이나 신화를 읽는 것 같은 오래된 이야기가 주는 신비감들이 잘 녹아져 있다. 미스테리 전문 작가 미미여사인 만큼 현실도 아닌 과거 이야기에는 더더욱  초현실 적인 느낌을 잘 녹여 내는것 같다. 6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동안 도미칸 나가야라는 동네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장지문을 열면 장난꾸러기 골목 대장 다이치가 지나갈 것 같고 필묵상 로쿠돈이 문구류를 팔고 무라타야 대본소에 외상을 걸어 놓고 갈 것 같다. 신비로운 아가씨 와카가 벛꽃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질 것 같고 또 어떤 날에는 떠돌이 낭인 무사 나가호리 긴고로가 나타나 주군의 암호 편지를 풀 사람을 찾아 달라고 할 것 같다. 주인공은 고향 시골인 도가네 번에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경험하고 그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상경한 딱히 재주가 없는 집안의 구박데기 둘째 아들인데 그런 인물도 도미칸 나가야에서는 사람 구실을 하면서 남들도 돕고 자기도 도움을 받으면서 잘 어울려 살아간다. 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짤막한 인터뷰에서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가족 내의 관계가 파멸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세상속에서 인간 관계의 따뜻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한다.

이 600쪽에 달하는 이야기의 큰 흐름은 주인공 쇼노스케의 아버지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미스테리한 사건과 그 배후에 있는 인물들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미스테리의 중심에는 정말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인물이 있지만 사건은 그 인물 하나의 존재만으로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이 얽혀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차마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을 정도의 비극이 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어서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연루된 사람이 많고 비밀이 많고 거짓말이 많을 수록 수상한 점들도 많을 수 밖에 없고 각각의 등장 인물들은 다양한 채널들을 통해 진실의 일부를 알아가게 되지만 또 그것들을 모르는 척 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으로 상황에 개입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미야베의 세상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대개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이어서 상황이 많이 꼬이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건을 바로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말미에 가서 등장 인물중 최고 권력자이자 주인공의 뒷배인 도코쿠 에도 대행이 나서서 사건들을 수습해서 해결하는 다소 손쉬운 결말로 마무리 되어서 약간은 힘이 빠진다. 하지만 사실 책을 읽다보면 주 이야기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진 햄, 치즈, 토마토, 피클, 양상추 같은 이야기 하나 하나 가 재미 있다보니 주 이야기는 "응? 그래서? 그래 맞다 그얘기는 어떻게 된거지?" 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 책을 마무리 하기 위한 수습 처럼 보였다. 이 책은 2014년에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럴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마치 전원 일기 같이 그냥 그 마을에 살면서 하나 둘 씩 생기는 재밌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정말 많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별명도 가지 가지다. 나는 일본 이름은 잘 인식이 안되기 때문에 어느 지역 어느 동네에서 무슨 가게를 하는 누구의 몇째 아들 누구의 이름은 무엇인데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는 뭐라고 부르고 또 누구는 뭐라고 부른다 - 같은 류의 문장을 읽고 기억하기가 매우 힘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의 인물들은 하나 하나가 개성이 분명하고 각자가 특정 에피소드로 주인공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이름이 기억도 잘 되고 인물들에 대해 애착이 간다.  그건 전적으로 작가의 힘이라고 칭찬할 수 밖에 없다.

미야베미유키 에도물 시리즈의 배경인 에도 시대는 1600-1860년대이다. 도쿠가와 막부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시대. 벛꽃 다시 벛꽃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1830년대로 에도 후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원군 시기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시기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비교적 적은 시기이다. 에도시대 이전엔 임진 왜란 그 이후에는 일본 제국이었으니 말 다했다. 일본 작가가 일본의 마지막 평화 시대에 가지고 있는 향수와 동경을 독자인 내가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될 것은 별반 없지만 뭔가 내가 그런 시선을 우리의 역사 속에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인 것 같다.  우리나라 소설책을 어느 정도 읽어 봤지만 딱히 들어가서 살고 싶은 시대나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로 참 각박하고 어려운 현실이고 애환이 서린 인물들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박완서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를 살았음에도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는 것 때문인데 아무래도 그 시대는 시대적 특수성 때문에라도 들어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 시대이다.  우리 나라 옛날 이야기에도 영웅전이 아닌 촌락 생활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라 시대도 고려시대도 조선시대도, 각박하지 않은 정많고 따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Sunday, August 16, 2015

Harvard Film Archive: "McCave and Mrs Miller" Robert Altman (director) Warren Beaty & Julie Christie


늦은 여름의 토요일. 아침엔 일을 하고 오후 늦게는 집안일을 했다. 저녁엔 집에 있기가 싫어졌다. 집에서 한블럭 떨어진 Harvard Film Archive에서 뭐하나 보니까 잘 모르는 70년대 흑백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다. 저녁 9시. 집을 나서서 바람쐴겸 무작정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영화가 좋은건지 아니면 주말이라 사람이 많은건지는 레귤러가 아닌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나중에 IMDB와 wikipedia를 찾아보니 엄청 유명한 영화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Ebert가 알트만의 훌륭한 영화중에서 독보적으로 완벽한 영화라고 했다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남편이 무슨 영화였냐고 묻는데 내 대답은 이랬다 " 재밌었어. 서부 영화. 근데 총쏘고 폼잡고 그런건 아니고,  재밌었다고 하기에는... 슬퍼서...인생이 허망하고 그래"

뭐 그런 묘한 영화였다.

비가 추적추적오는 궂은 날, 털가죽옷을 뒤집어 쓴 주인공이 노새 두마리를 끌고 쓰러져가는 탄광촌에 도착한다. 털가죽옷을 벗고 중절모를 고쳐 쓰며 술집에 들어선 워렌 비티는 주인공 포스가 가득하게 좌중을 휘어잡고 포커를 시작한다. 떠돌이 사업가인 주인공 멕케이브, 그는 가난한 광부밖에 없는 타운에 매춘업을 시작해서 사업을 일군다. 그러던 중 고급창녀인 밀러 여사 (줄리 크리스티)를 만나 동업을 하게 되고 사업은 번창해서 때가 찌들고 무너져 가던 타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좋은 건물들을 세우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맛있는 음식들을 만든다. 노동력 밖에 팔것이 없는 가난한 광부들 몸밖에 팔것이 없는 여자들은 전보다는 그래도 즐거운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게 된다. 주인공 멕케이브와 밀러여사 사이에도 애정이 싹튼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본 인근 타운의 마피아는 그의 사업을 매도할 것을 요구한다. 사업가의 자질은 있지만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셈도 잘 못하는 멕케이브는 밀러여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밀당을 하다가 딜을 망친다.  마피아는 보복으로 살인 청부업자 셋을 보낸다. 총질 할줄 안다고 소문은 났지만 실제로는 허당인 멕케이브는 간신히 청부업자들을 모두 쏘아 죽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눈더미 속에 쓰러져 외로이 죽는다. 그리고 밀러 여사는 마약굴에서 우수에 젖은 눈으로 천천히 연기를 태운다.

주연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조연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불완전한 인간들, 거친 무법의 세상, 가진것 없고 지킬것 없는 이들의 그런 저런 삶과 허망한 죽음.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혼자이고 가족이라는 것을 이룰 능력도 여건도 되지 않는다. 광부와 창녀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사는 사회. 그 속에서 언덕위에 무늬만 교회 하나 세워 놓고 무법 천지로 총질해서 사람들 죽으면 장례나 사람들 앞에서 주관하는 목사의 존재는 초라하고 무력하다. 포주인 멕케이브는 (이상하지만서도) 그 마을의 희망이었는데 그 마저도 그렇게 덧없이 사라진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집과 영화관 사이에 있는 Harvard Art Museum처마아래 잠시 서서 비를 피했다. 밝은 핀조명들 아래 반짝 반짝 빛나는 길과 거리들, 깔끔한 조경과 적막한 학내 길거리의 평화속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사람이 먹고 비를 피하고 잠을 자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노후를 준비하는 그런 어떤 것들도 기대할 수 없는 서부 개척시대 워싱턴주의 황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인간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게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박테리아 처럼 살아남지 못하면 끝나고 살아남은 자만 증식해서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라고... 눈을 들어 문명화된 도시를 보면 너무 다르지 않냐고 말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면이 있다. 장기 불황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 3포세대니 5포세대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과장이 아닌 시대에 우리의 동시대인들은 그렇게 덧없이 스러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김진영 박사님을 떠나 보내며


그가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 마지막으로 근무하러 나온 지난 목요일의 저녁에 그를 만났다.

그가 유학 온 이후로 10년을 탔던 자동차를 오늘 딜러샾에 팔았다고 한다.  일터에서 물건들도 정리하고 나를 만난 시간은 저녁 6시 반. 여름의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길치 방향치 그리고 일 이외에 몇가지 관심있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김진영박사님.  고작 몇달전에 나의 소개로 알게된 타이 가게에 텀얌누들숲에 폭 빠졌지만 또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15분이나 걸어 가야 하는 곳에 있는 식당은 절대 가지 않는 습성의 소유자다.

차 판 이야기를 한참을 하시기에 차 팔았으니 저녁을 쏘시라고 내가 덤테기를 씌워서 국수 두그릇에 타이식 파전까지 에피타이져로 시키고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커피가 맛있는 크레페 집으로 옮겨가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김박사님은 이야기를 참 잘 한다. 평소에 그렇게 은둔자처럼 살면서도 한번 만나서 말을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포닥때나 목숨걸고 일하느라 조용하게 살았지 이전 박사때는 엄청 사교적이고 잘 놀았던 것 같다. 그와 여러 잡다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런 사람이 있다. 얘기를 시작하면 가지를 치고 또 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첫 조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지 이틀이 지난 후인지라 조카, 아기, 인간의 발생학적인 특징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김박사님은 자기 조카의 환심을 얻으려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몇시간씩 밀어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김박사님의 한우물 파는 성격 덕에 한가지 이야기를 100번 들었다. 말인 즉슨, 자기가 이제 교수잡을 잡아서 가는 홍콩으로 오라는것. 홍콩이 돈도 많이 주고 좋다고 ㅋㅋ 아무리 내가 지금 자격이 안되서 못가는 거라고 이야기를 해도 심심하려고만 하면 그 이야기를 꺼네는 김박사님이 싫지만은 않았다. 본인이 지금 리크루트 하려는 두명중에 한명이라는데 내심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물론 "원서내고 인터뷰 가면 밥만 맛있는거 사주고선 리젝 주는거 아니냐"고 받아쳤지만 말이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지만 그냥 그렇게 앉아서 해가 지고 어두워 질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실감은 안나지만 오늘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앉아서 수다를 떨 수 있는 날이 오기 어려울 테니. 만남과 이별은 유학생 생활의 일상 다반사 이지만 그래도 어떤 이별은 세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한 구석의 등불이 가만히 꺼지는 것과 같은 기분. 조금 더 내가 작아지고 외로워 지는 기분. 깜빡이는 시간의 끝자락에서 헤어지고 연구실로 되돌아가는 길은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은 완벽한 여름 밤이었다. 밀린 일들을 하느라고 마지막 셔틀을 놓치고 가장 마지막 시내버스인 12시 45분차를 겨우 잡아 타고 지쳐 귀가 하는 버스 안에서 그래도 그를 알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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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리야드와 오딧세이
2. 새벽미사
3. 본조비
4. 친조카, 뉴저지조카
5. 지도교수의 첫 교수제자
6. Big Picture -Douglas Kennedy ( 변호사인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사진작가의 아이덴티티로 사는 이야기, 모든 것을 잃는 다는 것의 두려움, 작가의 힘)
7. Tom Yam Noodle Soup
8. 그림 그리기
9. 사서 걱정하기, 교수 쪼기,
10. 규칙적인 운동
11.  Early Bird
12. 귀걸이, 장신구
13. 굿딜로 인터넷 쇼핑하기
14. 깨끗한 벤치
15. 살빼야해



Sunday, August 9, 2015

서태지의 펜타포트 공연을 축하하며


서태지가 2015년 8월 8일 사상최초로 락페스티벌에서 참여했다. 이제껏 그는 개인 콘서트 혹은 한국 락페의 시발이라고 할수 있는 본인 기획의 서태지ETP콘서트등에만 출현해 왔다.  이번엔 이례적으로 인천 펜타포트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써 참여한 것. 락 매니아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대중가수로서의 서태지라는 편견을  부숴버리기에 충분한 압도적인 공연이었다. 대중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솔로 활동 이후로 단단히 다져온 파워풀한 락사운드의 셋리스트가 서태지 밴드 특유의 무대 장악력과 서태지 본인이 준비해온 아시아 최고의 음향장비와 화려한 퍼포먼스와 어우러지면서 락 매니아들을 열광시켰다. 그 결과 서태지는 10주년을 맞는 펜타포트에게  4만명이라는 최다 관객수기록을 선사하여 주었다.


이쯤에서 추억하는 작년의 컴백 콘서트 (뒤늦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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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태지 9집 컴백 콘서트 때 서태지 공연을 처음 가보았다. 그 때의 충격은 아직도 너무 생생하다. 특별히 9집 음악들은 정말 사운드들이 빼곡하게 차있는 굉장히 복합적이 노래들이 많은데 음 하나 하나가 너무 투명하고 깨끗하게 전달이 되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핵폭탄으로 무작정 고막을 다 깨부시는 것이 아니라 무림 고수가 단도를 들고 다가와서 슬쩍 지나가면 대나무가 100 조각으로 깨끗하게 절단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매운 작은 주먹 같은 음의 펀치들은 맞아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9집곡중 첫곡이었던 소격동이 울려 퍼질때 설레임과 환상적임 기대감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추억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넣은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음압을 조절해서 음들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는데 이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서태지가 추억과 그리움에 대해 노래할때 나는 내가 그를 그리워 했음을 진하게 느꼈다.

그리고 크리스 말로윈, 아 내가 이곡을 직접 듣다니... 선공개로 이미 많이 들었지만 서태지가 이 노래를 처음 세상에 연주할때 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크리스말로윈은 정말 신기한 곡으로 음악적으로 엄청나게 독창적인 곡이면서도 대중적으로 좋아할만한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가졌다. 그런면으로 볼때는 거의 하여가 같은 위상을 가졌다. 게다가 가사 하나하나에 심은 메세지들은 정말 2014년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 깊이와 힘이 깃들어 있다. 서태지 공연 홍보로 쓰인 컴백홈의 가사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얼마나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가. "대장... 나 이젠 잘 모르겠어" 라고 조용히 읊조리진 않았던가?  그런데 서태지는 아직도 그곳에 있다. 내가 바라보던 그곳에,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그곳에서 우리를 부른다. 대중들의 오해와 멸시 그리고 세월의 무게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음악적 도전을 멈추고 있지 않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나의 어린날의 우상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꼈다. 어린날 나의 가슴을 울렸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나는 울었다.

그리고 처음 멘트들 중에서 서태지가 그랬다. "어려분 많이 보고싶었어요" 그 목소리를 내가 들었고 그의 얼굴을 내가 보았다. [서태지가 인기가 있었을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팬활동 같은것은 해본 적이없었고 학창시절에도 팬이라는건 비현실적이고 소모적인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음반 사 듣고 좋으면 되는 것이지 극성 떨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는 이 순간 깨달았다. 스타를 스타로 만들어주는것은 팬이라는걸. 이후에 찾아서 알아 본 서태지와 팬들의 역사는 감동 그자체였다. 그 시절 한국적 현실에서 가수라는 존재는 방송국이 이용하는 소모적인 존재였을 뿐이었을때 서태지가 그토록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서태지를 서태지로 만든것은 절반은 팬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팬들을 정말 소중하게 대해 왔었다는 것을...] 이 컴백콘서트에는 그 는 오랜 시절을 함께해온 그의 동료고 친구이자 가족들인 팬들에게 아주 많이 보고싶었노라고 고백했다... 서태지는 이날 처음으로 "내모든것"을 불렀다. 오래전 늘어지도록 들은 1집에 수록된, 참 좋아하는 곡이지만 서태지가 한번도 방송에서 부른적이 없었던 그 곡을...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이제 제 모든것을 드릴께요 라는 멘트와 함께. (이 때 서태지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땅위에 서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9집의 성공으로 그는 다시 하늘위로 날아갔지만)

아무런 들을 준비가 없을 때 훅 들어온 숲속의 파이터, 잃어버린, 프리즌브레이크... 낮선 노래를 경청하는 묘한 고요함의 시간!?. 저와함께 여러분도 저물어간다?!는 멘트와 함께 시작한 90's Icon.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웃음 짓게하는 추억의 시간들이었다.

널지우려고해, 인터넷 전쟁, 헤피엔드, 컴백홈, 달리고 또 달리고 행복했다. 목청껏 따라 부르고 또 뛰었다.

교실 이데아....아 교실이데아... 이 노래가 나오고 열심히 따라 불렀던 그 교실 속의 나. 이제는 나는 대학을 졸업한지가 10년이고 박사 학위도 받고 공부하는 도시인 보스턴의 하버드 의대에서 연구원을 하고 있다.  평생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 이제는 곧 선생이 되는 길목에 있는 나.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됬다'고 하던 나는 과연 다른 선생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야만 한다!!

막곡 하여가
앵콜곡 take 5.
날아가는 노랑 종이비행기들.

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아우르는 음악들
꿈꿔왔던 생각들 품어왔던 이상들
2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나의 우상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
이보다 더 감동적인 콘서트는 내 생에에 더이상 없을 것 같다.














Saturday, August 8, 2015

고래 본 이야기


지난 주말에 Cape Cod  끝단 Provincetown에서 출발하는 Whale Watch를 다녀왔다. 3시간의 크루즈 동안 고래를 최소한 20마리는 본 것 같다.  고래를 발견하면 정교한 운항으로 가까이까지간 후 천천히 다가가서 아주 근접한 곳에서 고래들을 볼 수 있었다.

고래들은 멀리서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근처에서 물장구를 친다. 그 거대한 몸으로 점프해서 거꾸로 드러 누워 떨어지지 않나, 옆에 달린 팔에 가까운 하얀 지느러미를 하늘로 쳐들고 흔들지를 않나, 물을 공중으로 분사하지 않나,  그 멋지게 잘빠진 꼬리를 펄럭이지를 않나!

 다른 해양 생물들이라면 감히 천적에게 발견될까  자기 위치를 드러내기를 꺼릴텐데 천적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고래는 바다의 왕 답게 두려울 것이 없나 보다. 망망 대해에 거대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놀이를 하는 이 거대하고 멋진 생물 앞에 어른이고 아이고 넋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선체가 기울어지도록 한쪽으로 몰린 사람들은 고래가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고래들은 배가 다가오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계속 물놀이를 하는 놈, 작은 개인 보트 주위를 뱅글 뱅글 도는 아기 고래들, 그리고 수유중인 엄마와 아기 고래 등등 많은 고래들이 도망가지 않고 하던일을 계속 하는듯 했다. 쟤네들은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그만 인간들이 배를 조종해서 다가오는것은 알고 있을까?  혹시 우리가 다가와서 더 많이 물장구를 치는 것은 아닐까?  가이드를 해주었던 해양학자에게 물어보니 쟤네들은 우리와 상관없이 평소에도 물장구를 치고 산다고 답해 주었다. 수 km밖에서 망원경으로 보아도 쟤들은 저러고 있다고... 나중에 Cetacean Surfacing behavior 아래있는 Wikipedia 항목들을 읽어보니 이런 행동들에대해서 연구는 많이 되어 있는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했다. 가설들에는 다른 고래들과의 의사소통의 수단, 자신의 건강과 체력에 대한 과시, 물고기떼 사냥에 유리한 기술, 교미를 위한 유혹의 수단 등등이 있다.

고래는 정말 이상하다. 그리고 정말 멋지다. 그리고 그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 만으로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 고래는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수면 근처에서 놀라운 행동들을 한다. 나는 몇년전 샌디에고의 씨월드에가서 "샤무"쇼를 본적이 있다. 거대한 고래를 마치 돌고래 조련하듯 점프하게 하고 물장구 치게 하고 꼬리를 흔들고. 인간의 지시에 맞춰 움직이는 눈 앞의 엄청난 생물체에 경탄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로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고래들이 평소 얼마나 작은 수조 속에서 고통 받고 정신질환으로 죽기까지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때에도 나는 샤무 쇼를 본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동물원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에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저 안타깝다는 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Whale Watch를 가서 고래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면서 정말 씨월드의 샤무쇼는 존속되어야 할 근거가 하나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8년 한해에만 whale watch를한 인구가 13 million이라고 한다. 지난주에 고래 보고 와서 주변에 이야기 하니까 주변 사람들의 반 이상이 한번 이상 whale watch를 해 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배타고 나갔는데 고래를 한마리도 보지 못하고 왔다고 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Boston Harbor에서 떠나는 whale watch는 많이 멀리 나가지 않기 때문에 고래를 많이 못본다고 하고 내가 갔던 Provincetown이나 혹는 약간 북쪽의 Gloucester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고래 보는 시기는 4월에서 10월이라고 한다. 여름의 보스턴 앞바다는 플랑크톤이 많아서 물고기들이 많고 그래서 고래들도 밥을 먹으러 온다고 한다. (그래서 보스턴쪽 동부 바닷물은 캐러비안의 에메랄드빛이 아닌 혼탁하고 미역 같은 것이  잔뜩 떠다니는 그런 물이다)

내가 작은 빌딩속의 작은 방에서 작은 문제들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본 고래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 질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네들을 넓은 바다에서 그 큰 몸집으로 풍덩풍덩 물놀이를 하고 있을 데니...







 







Sunday, July 26, 2015

Team Based Learning

내가 참석했던 Teaching Institue의 첫날은 인상적이었다.

교육 철학에 대한 방대한 분량을 소화해야 했는데 강사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소그룹 활동을 통해서 서로 가르치고 배웠으며 정해진 시간에 깔끔하게 일정을 진행 할 수 있었다.

방법은 분량의 리딩자료를 세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에 2인 정도를 배정한 후 6명이 모여서 자신의 분량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읽어온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고 한명이 설명하기에 부족한 부분들은 다른 한명이 보충해 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설명하고 묻고 토론하는 가운데 엄청나게 참여도 높고 밀도 있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강사의 사전 준비와 체계적인 실행이 엄청나게 중요하겠지만 막상 대부분의 시간에 강사는 시간 관리 하고 학생들의 논쟁의 포커스를 재조정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일반적인 교수의 강단 강의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효과적이고 흥미로웠다.

위의 경험은 Team Based Learning이라는 테크닉과 닮은 점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다음 동영상은 UT교수들이 설명하는 Team Based Learning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xg5FTGZhZs

다양성을 최대화해서 그룹을 짤것
영구적인 그룹으로 만들것
모든 그룹에게 단일한 주제를 줄것
미리 리딩 숙제를 내줄것
토론을 통해 그룹내 답을 찾을것
스크래치 카드 테크닉 등을 이용해서 옳은 답을 찾아 낼때까지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할것
개인의 답을 정정할수 있는 기회를 주되 확실한 레퍼런스를 근거로 논리적 설명을 첨부할 것
그룹내 학생들끼리 서로에게 익명 피드백을 줄수 있도록 하고 점수에 반영할것

등등이 중요점으로 기억난다.

각자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 참 매력적이다.  진정한 학문의 전당은 이런 모습이여야 하지 않을까?


일요일 저녁의 단상


주말이 끝났다.

다시 한주가 시작된다.

똑같은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똑같은 오피스에 들어가서 똑같은 생각들을 하겠지.

아 몸아프다. 아 피곤하다. 아 불안하다.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반복적인 패턴을 반복하다가 내게 주어진 기회 주어진 시간을 다 소진해 버리면 어쩌지?

이런 패턴에 빠지는 원인에 대한 답을 얻었다.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 마음 가짐인데

마음 가짐을 잡기가 어렵다.

그게 예전에 젊고 건강하고 경험이 없을 때는 마음 가짐 잡기가 쉬웠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기에 너무 지쳐 버린 것이다.

테트리스처럼 쏟아지는 일들만 겨우 겨우 막아가면서 살다 보니

더이상 생각이라는 것도 하기 싫고 꿈을 꾸는 것도 사치 같고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우울하게 사는 것이다.

근데 이 원인은 마음을 잡는 다는 것이

오랜 세월 억지로 마음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위성으로, 오기로, 독함으로, 윤리로, 종교로

그렇게 마음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다.

나의 마음은 오랫동안 학대 받아왔다. 스스로에 의해서

채워주지 않고 일만 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들도

마음이 안먹어 지고 계속 미뤄진다.

못살겠다. 죽겠다. 다 포기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태도를 좀 바꿔 보려고 한다.

매순간 나를 돌봐 주기로

몸이 아프면 하던 일을 내려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배고프면 일이 좀 늦어져도 밥을 잘 챙겨먹고 일을 다시 하기로 한다.

하기싫은 일은 안해도 된다.

하고 싶은 일은 시간을 들여서 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가고 싶지 않은 모임은 가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억지로 뭘 하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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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실현이라는 거 하고 싶다.

어설프게 남들 비슷하게 살아보려다가 끝나는 삶 아니고

하루를 살아도 나 답게




교수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하여


내가 몆주전에 참석했던 교수법 워크샾 (Teahcing Institute) 에 4일을 들여서 참석하면서 얻은 것중 가장 큰 것은 교수라는 직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사과정에 들어오고 나서 부터 언젠가 부터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너무나도 스트레스와 과로에 찌들어사는 포닥들과 교수들을 보면서 과연 저 직업을 얻기도 어렵겠지만 얻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기쁨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박봉인 직업이라 내 주변의 많은 포닥들은 차라리 회사로 가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괴로움이 너무 커서 "과연 내가 과학을 그리고 연구를 그만큼 사랑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매 순간 하게 된다. 어떤 때의 대답은 '그렇다' 이지만 다른때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일 때도 있다.

그런데 교수법 워크샾을 통해서 접한 bell hooks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다른 여러 교육철학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교수라는 직업이 소명을 가지고 임하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선생은 마음 먹기에 따라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학점을 주는 사람', '혹은 대학원생과 포닥을 고용하여 연구실적을 뽑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비를 따내는 사람'으로 축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20여년 가까운 학교 생활을 통해 기억하는 선생님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 먹지 않은 선생님들도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들의 관심, 그들과의 대화와 경험이 나를 지금의 이곳으로 이 모습으로 있게 했다.

내가 12살때 영국에 갔을때 oxford와manchester 시에서 붙여준 영어 튜터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난다. 영어 못하는 나에게 쉬운 책을 읽어도 배지를 주기로 했던 Sale moore high school의 배려가 내 독서에 끼친 영향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4학년때 일기에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들을 차별한다'고 썼다가 불려가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를 물으셨던 나이많은 여선생님도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때 좋은 소설과 수필을 소개시켜 주셨던 윤리 선생님도 생각난다. 꼭 개인적이지는 않아도... 어린 학생들도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찾아서 읽고 배울수 있다고 믿는 믿음 위에서 우리를 대화가 가능한 사람으로 대했던 그 선생님의 태도가 기억이 난다.

나를 가장 많이 바꾼 것은 대학 3학년때 Liberal Art College에 교환학생을 갔던 경험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미국의 대학들이 그런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곳의 교수님들은 정말 레주메가 빵빵하신 분들인데 그 미네소타 시골 구석에서 적은 학생들을 데리고 정말 재미나게 수업을 하시던 분들이다.  나는 그곳에서 틀에 벗어난 수업 방식을 많이 경험했고 교수님들과 인격적으로 수업을 받았고 교수님들은 나의 언어의 부족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곳에서 공부는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많은 자신감도 얻었다. 만일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유학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박사 지도 교수님. 내게 생각하는 법, 말하는 법, 연구 하는 법, 글쓰는 법을 가르쳐준 선생님. 7년의 박사 동안 나는 교수님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고 교수님의 머릿속을 따라갔으며 그는 내가 가까이에 할수 있었던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의 조교수시절 어색한 멘토링과 그에 따른 웃지못할 헤프닝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는 아예 멘토링이라는 것 자체를 그만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의 영향력이라는 건 나의 세계관, 학문관에 유일무이한 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학문관과 세계관과 또다른 옵션들을 보고 경험하게 해준 나의 포닥 지도교수님들 역시 나를 바꾸어 놓았고 매일 매일 바꾸고 있다. 특히나 포닥 2년차에 지쳐 나가떨어질 뻔한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기회인 지금 연구실은 과거에 경험했던 주류 학문관에 도전이 되는 아이디어들을 던져 주고 있다.  나의 현재 지도교수는 무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학문적 풍토 위에서 메말라가는 학문을 하는 기쁨, 사제간의 인격적인 관계, 일과 생활의 발란스 등등의 문제를 중요시 여기고 스스로의 연구실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이는 나의 오랜 고민 "학문을 하려고 하고 연구를 하려고 한다면 수반되는 살인적 스트레스는 감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세계관 속에서 10년간을 경험해온 나에게 이 옷은 아직까지 매우 다르고 어색하다. 그리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과연 이것이 viable option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설령 내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지도교수님 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자라나거나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의 지도교수의 철학에는 내가 꿈꿔왔던 많은 것들이 들어 있으며 전부 다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일부 만이라도 구현할 수 있다면 내가 만들어갈 작은 공동체가 덜 괴로운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직 포닥일 뿐이야." 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대학교 3학년 여름 미네소타의 실험실을 기억한다. 옆방 지도교수님이 나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해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단지 학부생일 뿐인걸요" 라고 말했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교수가 "단지 학부생" 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매 순간 매 시기 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 스스로를 작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었다. 또 한편 박사 3년때쯤 내가 같은 연구실 동기로 부터 전해 들은 선배 박사의 나에 대한 평가는 "지혜의 단점은 스스로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라는 말이었다. bell hooks는 교육 철학에 대한 글을 학부생일 때 부터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고민하고 확립하고 믿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은 당장 지금 부터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자에게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답을 얻고 믿는대로 살아보자. 그것만이 유일하게 삶을 의미있게 사는 것일테니. 더이상 남들이 바라는 대로의 역할하면서 턱걸이 하느라 허덕이는 삶을 살지말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사실 그것이 유일하게 살 길이다.



덧붙여서...스스로에게 당부의 말: 삶에 의욕이 없고 진로에 회의가 든다면 언제든 bell hooks의 글을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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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Title: Teaching To Transgress
Author: bel hooks (Gloria Watkins)

Key Words:
Engaged Pedagogy
Education as a "practice of freedom"

Key Phrases:
They were comitted to nururing intelect so that we could become Scholars, Thinkers and Cultural workers- black folks who used our "minds" (p2)
Gone was the messiac zeal to transform our minds and beings that had characterized teachers and their pegagogical practices in our  all black schools. Knowledge was suddenly about information only. It had no relation to how one lived, behaved. It was no longer connected to antiracist struggle. Bussed to white schools, we soon learned that obedience, and not a zealous will to learn, was twhat was expected of us. Too much eagerness to learn could easily be seen as a threat to white authority.
It surprised and shocked me to sit in classes where professors were not excited about teaching, where dithy did not seem to have a clue that education was about the practice of freedom.
The vast majority of our professors lacked basic communication skills, they were not self-actualized, and they often used the classroom to enact rituals of control that were about domination and the unjust excerscise of power. In these settings, I learned a lot about the kind of teacher I did not want to become.
excitement in class
excitement is generated through collective efoort.
Long before a  public ever recognised me as a thinker or writer, I was recognized in the classroom by students - seen by them as a teacher who worked hard to create a dynamic learning experience for all of us.
To educate as the practice of freedom is a way of teaching that eanyone can learn. That learning process comes easiest to those of us who teach who also believe that there is an aspect of our vovation that is sacred. who believe that our work is not merely to share information but ot share in the intellectual and spiritual growth of our students. To each in a manner that respects and cares for the soulds of our students is essential if we are to provide the necessary conditions where learning can most deeply and intimately begin.
That means that teachers must be actively committed ot a process of self-actualization that promotes their own well-being if they are to teach in a manner that empowers students.
I was certain that the task for those of us who chose this vovation was to be holistically questing for self-actualization.
I learned, along with other students, to consider myself fortunate if I found an interestingprofessor who talked in a compelling way. Most of my professors were not the slightest bit interested in enlifhgtment.
It is often productive if professors take the first risk, linking confressional narratives to academic discussions so as to show how experience can illunimate and enhance our understanding of academic material. But mostprofessors must practive being vulnerable in the classroom, being wholly present in mind, body and spirit.

Other's Blog that has more quotes from the article:
https://thephoenixfalls.wordpress.com/2009/05/27/bell-hooks-teaching-to-trangress/

Saturday, July 25, 2015

2015년 여름의 어떤 주말 밤


2015년 7월 25일 토요일

저녁 8시 55분. 하버드 스퀘어에서 가장 people watch 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글을 쓰고 있다. 하버드 공식 기념품 가게인 Coop맞은편 스타벅스 2층. 큰 창가 옆에 위치한 쇼파에 앉아있으면 창밖에는 차들이 대기 신호를 받아 서있고 그 앞으로 폭이 10미터는 충분히 넘을 횡단보도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큰개를 데리고 가는 사람, 유모차를 끄는 사람, 친구들과 야광팔찌를 잔뜩 끼고 얼굴에 분짱까지 한 무리들...이렇게 보니 이 동네는 학교앞 답게 20-30대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것을 그닥 인지하고 살지 않았는데 실리콘밸리에서 사는 친구가 방문했다가 그런 지적을 한 뒤로 부터 보니 정말 그러하다.

나는 방금 집에서 저녁을 먹고 샤워를 간단히 하고 편하고 자잘한 프린트가 많이 있는 히피 스타일 원피스에 검정색 펠트 모자를 눌러 쓰고 로션만 바른 맨 얼굴로 이 번화가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주일간 몸도 엄청 아팠고, 야근도 심하게 한데다가 실험은 지질이도 안되고 겨우 겨우 결과를 내 보았는데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이 나서 멘탈까지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뭔가 엄청난 발견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그마저도 안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는 연구라는 것들도 그저 의미없는 허송세월이 아닌가 싶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이 왔다.  남편이 이른 아침 High Rise라는 근처 빵집에서 사온 빵과 지난달에 두바이에서 놀러온 친구가 사다준 고급 홍차로 아침을 먹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학교 수영장에 가서 한시간 정도 수영을 했다. 이 수영장은 지지난주에 이어 두번째로 방문하는 것인데 참 오랫만에 수영을 다시 시작했는데 두번째 만에 제법 실력을 회복해서 숨차지 않는 페이스로 원하는 만큼 왕복을 할 수 있는 정도를 되찾았다. 퍽이나 뿌듯했다.  그리고 집에와서 만두국을 끓여 먹고 남편이랑 영화를 보았다. Best Exotic Marigold Hotel. 그리고 나서 남편 낮잠 자는 옆에서 아이패드로 피아노 치는 게임을 한시간 정도 했다.  저녁 7시가 되었고 잔치국수를 끓여서 "삼시세끼 어촌편" 엥콜편을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연구실에 가면서 나더러 근처 카페라도 가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라기에 이렇게 나왔다.

먼 훗날 지금 이순간을 되돌아 보면 어떤 느낌일까? 분명히 그 때 상황에 맞추어 취사선택된 기억으로 지금을 말하겠지. 나는 고용이 불안정하고 장래가 불투명한 외국인 노동자, 서른 다섯, 노산의 출발선을 눈앞에 두고도 결혼 7년 차에 아이 가지는것을 꿈꿀수 없는 맞벌이 여성, 그러는 동시에 10여년전 대학을 졸업하면서 꿈꿨던 그 모습 그대로를 현재로 살고 있는 참 복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Tuesday, July 14, 2015

대학교수법전공 교수를 당황케 만든 과학분야 박사들

과학 전공자를 위한 대학 교수법을 강의하는 4일짜리 워크샾에 참석했을 때의 해프닝이다.

Higher Education을 전공한 교수가 여러가지 효과적인 교수법을 실제 실험을 통해 소개시켜 주고 있었다.  교수법의 이름은 Low Cost Clicker. 학생들에게 선다형 문제를 주고 각자 고민하게 한 다음 답안을 무기명으로 받아서 통계를 낸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보드에 칸을 만들고 스티커를 붙이게 하면 된다). 그 이후 학생들이 그룹 토론을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답안을 내게 하고 통계를 낸다.

이 예로 든 것이 " 오븐에 파이를 굽는데 한개의 파이를 굽는데 특정 온도와 시간이 필요하다면 두개의 파이를 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였다. 선택지는 1)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2) 온도를 올린다 3) 시간을 늘린다 4) 온도와 시간 모두 높인다.

때는 오후 2시 반. 아침 9시부터 계속된 워크샾의 피로가 밀려오던 중에 이 문제를 놓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소그룹 토론하기 전의 통계는 2/3이 1번, 1/3이 3번, 그리고 단 한명이 4번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토론이 끝난 후에 다시 답을 모아 통계를 냈는데 결과는 이전과 완전히 똑/같/았/다!  지도 교수는 이를 보고 이런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며 할말을 잃었다. 아마도 과학자들이 엄청 설득하기 어렵고 고집이 세다고 여긴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하려던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도 말을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대체 이 연습의 포인트는 뭐였는지... 사람들이 다수의 생각을 알게 되면 동조하게 되나? 그게 좋은건가?

참고로 이 문제를 받았을때 나는 "별걸다 가지고 열을 낸다"라고 쿨내를 내면서 당연히 1번이라고 스티커를 붙였는데 랩에 돌아와서 이 사건을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 거슬렸다. 첫째로 이건 열역학의 문제인데 비전공자들 간의 토론의 대상이 될수 있는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둘째로 과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포스닥들의 1/3이 (그리고 유아독존하는 한명이) 오답을 낸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2/3의 정답을 아는 과학박사들이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문제 자체가 별것도 아닌데 목숨걸일 있나? 근데 이 때의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주 흥분해 있었고 스티커를 붙이는 손끝 하나하나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이 기현상을 생각하면 할 수록 소위 가장 비판적이고 이성적이며 토론을 장려하는 박사교육과정을 거쳤음에도 학위 소지자들이 발전적인 토론을 통한 문제해결을 잘 하지 못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굉장히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설득시키기도 어렵다는것은 상당히 암울한 부분이다. 학위와 지위가 주는 "나는 안다" "나의 논리는 옳다"라는 사고방식이 30대 초반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이미 깃든것은 아닐까?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아는 문제가 나왔기에 흔들림이 없었지만 혹시나 내가 확실히 모르는 문제를 마주했을때도 "내 나름의 근거"를 대며 주장을 굽히지는 않을런지... 앞으로 살면서 경계해야 할 부분인것 같다.



Saturday, June 27, 2015

과학자, 종교인, 그리고 동성연애

나는 박사 과정을 할 때 한 작은 전공 관련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참가자들끼리 작은 그룹으로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과학자이면서 신을 믿는 다는건 모순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신을 믿는다. 나는 크리스쳔이고 그것이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과학자 커뮤니티에서는 위의 발언 같은 것이 상당히 "미개한" 발언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와 같이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나의 동료 크리스쳔 과학자는 자기가 TA하는 학부 학생이 자신에게 다가와서 "당신같은 과학자가 종교를 믿는다면 나도 종교를 믿어보고 싶다" 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고도 했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이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나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다닌지 7년만에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12년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는 크리스쳔이다. 나는 사춘기와 성장 과정 동안 내 스스로와 세상과 삶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었고 그 여정 끝에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매우 소중하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믿는 신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신에게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관계 맺는 인격체인 것이다.

나는 과학자고 종교인인 동시에 세계시민이다. 이 입장에 섰을때, 종교의 자유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며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불이익이나 억압을 받아서는 안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두 성인이 서로의 합의 하에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회적 편견과 가족들의 핍박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사랑과 결혼을 못하는 억압받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사춘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거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첫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약혼을 하고 축복속에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영화와 소설들의 영원한 주제이고 우리삶의 핵심이 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소수라는 이름으로 이 영역을 누리지 못하며 차별과 불이익을 겪는다.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여 여성 평등과 인종 평등을 이루었다면 2015년 이루어진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은 또 하나의 인간 이성의 승리인것이다.

크리스쳔으로써 동성 결혼 합헌 결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나는 그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크리스쳔으로써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사회가 허용하는 것에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사회는 크리스쳔의 것이 아니므로 사회의 준거 기준에 의해서 법적규제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를 비이성적으로 억압하는 모든것들이 철폐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것은 세계 시민으로써 뿐 아니라 종교인으로써도 과학자로써도 모순이 되지 않는다. 만일 이 사회가 무슬림을 억압하고 법적으로 불이익을 준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무슬림들의 권리를 위해서 지지를 보낼 것이다. 내가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을 지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 누구도 억압받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세상이 신이 세상을 만든 가장 기본적인 섭리라고 생각한다.


















Wednesday, June 24, 2015

첫 글

가끔씩 말들이 차오르는 때가 있다.
혼자 걷는 통근길에서
며칠간 우리집을 방문했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오랫만에 강변에 조깅을 나와서
또는 그냥 혼자 점심을 먹으면서
머릿속에 어딘가로 부터 흘러 들어와서 말들이 쌓이고
짧은 글들이 되고
또 잊혀지는 일들이 반복된다.

이 말들은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말들이 차오를 때
나는 딱히 이런 이야기를 할 벗이 없거나,
있더라도 말을 꺼내기에 참 생뚱맞을 때가 대부분이다.

말들은 다시 수면위로 내려가고 흩어진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은 왠지 슬프다.

그래서 오늘은 무작정 가방에 있던 노트북을 꺼내 들고
파네라에서 주는 공짜 와이파이에 접속해서
블로그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타려고 기다리던 셔틀버스를 놓쳤다)